그대들 어떻게 할 것인가
<風の谷のナウシカ>, 1984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결말은, 개봉 당시 ‘진부한 영웅 서사’라는 명목으로 비평계의 뭇매를 맞은 바 있다. 일견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숱한 여정을 거친 구도자가 양 진영의 한가운데에 몸을 던지고, 기적적으로 부활한 뒤 갈등을 봉합하고는 군중으로부터 환호를 받는다. 눈물을 훔치는 노파와 찢어져라 웃는 아이들. 이들 장면의 역할은 대개 시트콤의 웃음 트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시면 됩니다’라는 큐 사인이다. 그러니 <나우시카>가 특출난 한 사람의 개인적 구원처럼 읽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너무 쉬운 해석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잠깐 권위에 호소해도 된다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재정의한 거장의 데뷔작이 이토록 허약한 구두점으로 마무리 되었을거라고 믿기는 어려운 일이다. 분명 무언가가 숨겨져있을 것이다.
<나우시카>에는 세 명의 공주가 등장한다. 망국 페지테의 공주 래스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토르메키아의 황녀 쿠샤나. 쌍둥이처럼 동일한 외형을 가진 세 공주는 인간의 존망이 걸린 부해의 문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하야오식 ‘인간 대 자연’을 최초로 선 보인 본작에서, 이들 세 공주는 상이한 태도를 담지한 최초의 항들이다. 비록 쿠샤나의 지적 카리스마와 나우시카의 온정주의가 우리의 시선을 끌기는 하지만, 우선은 래스텔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그녀가 사건의 시발점이기도 하니까.
사실 래스텔에게 할당된 서사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녀는 스크린에 등장한 지 삼 분도 채 안되어 죽는다. ‘병기를 파괴하라’라는 유언만이 나우시카에게 사명으로 남을 뿐이다. 그 이후 래스텔은 그녀 본인이 아니라 주변인의 언급으로만 존재한다. 손에 채워져있는 수갑이 암시하듯 그녀의 이상은 그녀 안에 묶여있으며, 정작 그녀의 영향력은 여동생의 죽음으로 분노한 오빠 아스벨의 복수라는, 본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형상으로 발현된다. 실행을 타인에게 위임한 이상은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는 법이다.
쿠샤나는 어떨까. 그녀는 유능한 장수로,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십분 발휘해 주변국들을 토르메키아 왕국에 통합한 뒤 부해에 전면적으로 맞서고자 한다. 부해에 물든 팔을 주저없이 잘라버리고 의수로 대체한 모습에서 그녀의 결단력을 엿볼 수 있다. 래스텔의 수갑과 대립 쌍을 이루는, 그녀의 선제적이고 통제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장치다. 여기저기 뒤틀린 자신의 몸을 보며 ‘미래의 남편은 흉한 꼴을 보게될 것’이라고 자조하지만, 희생의 결실은 명확하다. 그녀는 정말로 성공할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중용의 나우시카다. 그녀는 래스텔처럼 무력하지 않다. 그녀는 쿠샤나처럼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반응한다. 잔뜩 긴장한 채 하악대는 야생동물에게 손가락을 내어물리고는 ‘아프지 않다’며 안심시키고, 상처를 입은 채 부해의 강으로 들어가려는 오무를 저지하며 자신의 발목을 희생해 대신 아파한다. 나우시카에게 자연은 적이나 대립물이 아니라 헤아리고 공감해야하는 관계이다. 쿠샤나의 탱크, 공중항모와 달리 나우시카의 비행수단인 메베는 바람의 조력 없이는 날 수 없다. ‘진부한 결말’의 전개 역시 그녀가 먼저 뛰어들어 먼저 죽는 반응의 형태를 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람계곡의 마지막 요충지를 앞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쿠샤나는 바람계곡 백성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희 공주님의 대단한 점이 무어길래 그렇게 떠받드느냐?’ 백성은 답한다. ‘마을 사람들도, 나조차도 이 부해에 물든 손을 저주받은 손이라고 기피할 때 나우시카 공주님만이 ‘노동으로 물든 아름다운 손’이라고 쓰다듬어주셨다’. ‘아름다운 손’이라는 신체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쿠샤나의 자신의 몸을 향한 냉소와 대조를 이루며, 나우시카 자신의 손이 아닌, 그 손으로 쓰다듬은 타인의 손에 중점이 놓여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관계적 사고방식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세 공주의 손을 둘러싼 모티프가 종합을 이루는 순간이다.
똑같이 생긴 세 명의 공주가 있다. 똑같은 목적을 가진 세 명의 공주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전쟁에 임한다. 무력한 이상, 무력을 통한 통제, 수용과 공감. 상이한 방법론을 상징하는 세 개의 가능성을 같은 출발점에 세워놓고, 오로지 한 명만 결승선을 통과시키는 구조다. 나우시카가 성공하는 이유는 오래된 예언이 아니라 작품의 윤리가 그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한발짝 뒤에 서서 도식을 내려다보면, 비로소 ‘노파의 눈물과 아이들의 웃음’이 값싼 리액션 유도가 아니라 ‘이것만이 옳은 길’이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선언임을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젊은 작가의 야심과 어깨힘이 잔뜩 들어간 도발적인 작품이지만, 모든 가능성을 닫아놓는 교조적인 훈계는 아니다. 토르메키아 항모에 구금된 나우시카가 래스텔의 옷을 입고 변장해 탈출하는 장면이 그 증거다. 앞서 여러번 짚었듯 같은 외형을 가진 공주이기에, 래스텔의 옷을 입은 나우시카는 더 이상 그녀와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무슨 얼굴을 타고나는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무슨 옷을 입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