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호프. 호포? HOPE.

솔직해지자. SF는 미국의 전유물이다. 아니면 적어도, 오늘날의 블록버스터 SF는 미국의 전유물이다. 초호화 우주선과 푸른 피부의 외계인을 생동감 넘치게 영상화할 수 있는 압도적 자본력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그 이유도 크긴 하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미국만이 그 미래를 ‘믿을 만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째서 첩보전은 항상 중동에서 벌어지고, 핵전쟁은 러시아만 시작하며, 갱스터의 암투는 이탈리아계 미국인들만 일으키는가? ‘그 사건은 그곳에서 벌어져야 마땅하다’라는, 관객의 무의식에 각인된 문법 때문이다. 한국 SF 영화가 죽을 쑤는 이유는 한국에 유능한 각본가와 연출가가 없어서가 아니다. 한국의 초일류 영화감독 봉준호가 SF를 찍을 때면 예외 없이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미래는 영어로 말한다. 이것은 뭇 예술가가 깰 수 없는 리얼리즘의 약속이다.

나홍진의 <호프>는 개봉 전부터 ‘강렬한 도입부’와 ‘처참한 CG’ 같은 악명으로 관객의 기대심을 높였다. 한국 장르 영화의 아픈 손가락과도 같은 SF 장르를, 나홍진이라는 거대 감독이 집도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헤드라인이다. 상기한 문단과 같은 이유로, 미국이 아닌 타지에서 SF 영화를 찍는다는 건 필연적으로 할리우드의 패권에 대한 도전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 게섰거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도대체 몇 번이던가.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라는 현지의 유명배우들까지 용병으로 고용한 데에는 분명 강한 야망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프는, <호프>는 ‘할리우드와의 정면승부’가 아니다. <호프>는 차라리 ‘할리우드와의 정면승부’를 영화의 내면으로 수용해 배출하는 작품이다. 영화 곳곳에 뿌려진, 장르의 지정학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몇 가지 장면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영화의 막을 여는 호포항 추격전. 길가에 늘어져있는 죽은 소를 보고, ‘호랑이의 짓일 것이다’라는 결론 아래 도축의 원인을 찾아 헤매는 황정민이 이 1부의 주인공이다. 최악이래 봐야 민가 급습 및 약탈이 전부일 거라는 나이브한 믿음은 복덕방에 시꺼멓게 뚫린 구멍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사지들을 보고 차갑게 얼어붙는다. 발자국 핏자국을 좇아 어느 집 앞에 도달한 황정민은 이내 그 안에서 들리는 기척에 발걸음을 멈춘다. 유리문을 통해 방 안의 어둠을 들여다보던 황정민과 그 동행, 첫 번째로 피해자, 두 번째로 괴물의 손, 세 번째로 괴물 본인이 순서대로 나타나고, 두 사람이 사격을 시작하자마자 괴물은 벌떡 일어나 초가지붕을 부수고 동행의 머리를 썩은 사과처럼 쪼개버린다.

묘한 구도다. 길가에 흩뿌려진 단서들을 좇아, 어두운 방 앞에 서서 네모난 프레임을 통해 괴물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니. 여기서 황정민이 가지는 기대는 관객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나 보자’라는 호기심이다. 시골 경찰에 불과한 주인공은 곧바로 총알을 퍼붓지만 괴물은 프레임을 부수고 뛰쳐나와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잔해에 불과했던 폭력은 비로소 실체를 갖게 되고, 사건은 황정민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형국으로 말려든다. 정호연의 화력 높은 지원사격으로도 멈출 수 없던 괴물의 진격은 ‘사거리의 트럭’이라는 작위적인 플롯의 개입을 마주하고서야 겨우 정지된다.

호포항의 사건이 일단락된 후에 카메라는 곧장 깊은 산속 울창한 숲으로 이동한다. 여기서는 조인성의 2부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다. 2부는 1부보다 한층 더 괴상하다. ‘안에서 한탕하고 나오자’라며 무리를 이끄는 조인성은 배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원형의 거대한 구조물 앞에 다다른다. 조심스레 내부로 진입하자 조종간처럼 보이는 공간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지하실이 나타난다. 곧이어 외계인의 새끼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생명체가 숲 전체가 울리도록 괴성을 지르고, 이에 응답하듯 우주선 외부에서 동시다발적인 움직임이 포착된다. 우주선의 주인임을 직감한 조인성은 다시 무리를 데리고 숲 한가운데로 그들을 추격하지만 이내 자신이 그들에 함정에 꼼짝없이 붙잡혔음을 깨닫고, 필사의 항전을 시작한다.

2부에서 거듭 목격되는 것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할리우드의 강한 정취다. 우주선의 내부는 마치 인간의 장기를 본뜬 것 같은 외형을 하고 있는데, 이는 <에이리언>의 시그니쳐와도 같은 미술 디자인이다. 정글 한가운데, 동료가 모두 죽고 혼자 남겨져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다가 더 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어지자 칼을 빼들고 ‘지구인의 무서움을 보여주겠다’며 외계인에게 맞서는 조인성의 모습은 빼도 박도 못하는 <프레데터>의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외견의 유사성도 연출에 비하면 노골성이 약하다. 가장 강하게 장르적 관습을 내보이는 것은 조인성의 믿을 수 없는 신체 내구성이다. 내던져지고, 후드려맞고, 팽개쳐지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뒤통수가 나무에 으깨지는데도 도저히 죽을 기미가 없는 그의 단단함은 한 때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아니면 허용될 수 없었던 주인공의 플롯 아머에 다름 아니다. ‘쟤는 왜 저렇게 말을 잘 타냐’라며 거듭 신기해하는 동료의 감탄도 주인공의 위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조인성을 제외한 무리의 다른 인물들은 그의 절반도 안 되는 충격을 받고도 낙엽처럼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 카메라의 편애는 노골적이다 못해 이기적일 정도다.

조인성의 영웅적 기상이 빛나는 BAD-ASS한 도로 위 추격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기존의 원형 우주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우주항모가 불길을 이글거리며 저 멀리 산 위로 추락한다. 그러자 난데없이 인간들을 추격하던 두 외계인이 자리에 우뚝 서서 그 함모를 내다보며 자막과 함께 드라마틱한 대사를 치기 시작한다. “우리에겐 3몰리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어요”, “제 심장을 바쳐서라도 아이를 구하겠습니다”, “그 아이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흘러가는 꼴을 보니 두 외계인은 대충 종족 전체가 위기에 처해 지구에 불시착한 피란민이고, 항모는 본 행성에서 날아온 것이며, ‘아이’에게는 종 전체를 구할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트랜스포머>나 <맨 오브 스틸> 따위의 미국 SF 영화에 갖다 붙여도 그대로 적용될 이 할리우드 신파 공식이 느닷없이 등장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프레임을 부수고 나오는 괴물, 조인성의 초인적인 행적, 후반부 외계인의 대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은 할리우드 SF 서사와 나홍진의 기존 한국식 스릴러의 충돌이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읊어주는 “세상에”나, “하나님..”이나, 심지어 “Holy Shit” 같은 백인 문어체적 대사들은 영화 전체에 의도된 이물감을 부여한다. 분명 ‘호포’라는 깡촌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학살 사건에 불과했던 이야기는 종반부 (할리우드 스타가 맡은!) 외계인의 ‘아이가 우리의 희망’이라는 대사를 통해 강제로 ‘HOPE’라는 제목으로 음차 당하며, 주인공의 자리를 찬탈당한 황정민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목적지도 없이 고속도로를 내달리며 내뱉는 “나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라는 의아 섞인 탄식뿐이다. <곡성>의 “뭣이 중헌디”와도 공명하는 대사지만 여기서 황정민이 붙잡힌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신비라기보다 자신이 갇힌 장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장인물의 의구심이다. 문법의 선택을 받은 조인성은 다시금 몸을 가누고 도로 위로 올라와 반격의 여지를 강하게 암시하지만 이야기는 이미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 바깥에 있다.

영단어 Alien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외계인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이다. 나홍진은 한국 SF 영화가 마주하는 장애물을 통과하는 대신, 그 장애물을 그대로 내보임으로써 다시금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원초적 공포라는 그의 오래된 테마에 도달하기를 시도한다. <호프>에서 침공당하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장르다. 침공하는 것은 외계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프레임 끝자락까지 메타적인 영화를 관객이 얼마만큼이나 받아들이고 즐길지는 쉬이 예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난 도대체 이게 무슨 영화인지 모르겠어’라는 의아함을 품고 나오는 관객들은, 전혀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당혹감이야말로 <호프>가 끝내 지키려는 리얼리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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