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회의 예술
<魔女の宅急便>, 1989
무언가를 전달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배달과 예술은 닮았다. 어느덧 열세 살이 된 키키는, 정식 마녀로 거듭나기 위해 정든 마을과 가족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건조한 일기예보와 흥겨운 팝송이 흘러나오는 라디오, 키키의 검은 고양이 지지를 태운 엄마의 빗자루는 고무공처럼 나무 사이를 튕기며 바다가 보이는 마을로 키키를 나른다.
전원적인 고향 마을과는 완전 딴판인 도시 환경에 키키는 적응하는데 애를 먹는다. 당장 먹을 것도 머리를 뉘일 곳도 없는 상황, 당분간은 팬케이크로 세끼를 때워야 할 듯하다. 양손 한가득 생필품으로 가득 찬 갈색 봉투를 쥐고 진열장 너머의 붉은 구두를 바라보는 키키의 눈은 동경심으로 가득하다. 도시 멋쟁이들과 맵시 좋은 아가씨들을 태운 자동차를 흘겨보는 눈은 질투심으로 가득하다. 영락없는 성냥팔이 소녀의 서러움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허한 마음으로 바닷가만 내려다보던 키키. 아기의 공갈젖꼭지를 놓고 간 손님이 이미 저 멀리 골목길을 돌아가는 걸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아주머니를 보고는 이내 무언가를 느낀 듯, 자신이 대신 갖다 줘도 되겠냐 묻고는 곧장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 손님에게 그것을 돌려준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키키에게 손님은 감사인사가 적힌 쪽지를 쥐어주며 아주머니에게 꼭 전해달라고 당부한다. 쪽지를 읽은 아주머니는 미소를 띄우며 배달의 답례로 키키에게 커피와 빵을 내주고, 속사정을 들은 후엔 빈 다락방을 내주고 전화기도 써도 된다며 배달부가 되겠다는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다.
본격적으로 배달 업무를 개시한 다음 날, 어느 귀부인이 찾아와 인형 고양이가 담긴 새장을 조카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 시외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 까마귀 무리와 시비가 붙어 인형을 잃어버린 키키는 궁여지책으로 지지를 대신 새장에 앉히고 배달을 완료한다. 조심성 없는 꼬마와 대형견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지지는 키키가 숲으로 돌아가 인형을 찾아온 후에야 겨우 구출된다.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버리던 키키는, 할머니와 정성껏 구운 청어호박파이가 손녀에게 단호히 거절당하는 모습을 보게 되자 결국 하늘을 나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서 노동은 언제나 특정한 위상을 가지지만, <키키>의 그것은 여타 작품과는 사뭇 다르다. 비록 ‘마녀도 교통법규는 지켜야 한다’며 도시의 쓴맛을 본 키키의 비행이지만, 그녀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오를 때마다 예외 없이 행인들은 선망의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휘파람을 불고, ‘브라보’를 외친다. 정작 비행의 목적은 시내에서 시외로 감자를 옮기는 허드렛일임에도 그렇다. 키키의 비행이 우르술라의 그림과 대구를 이룬다는 점에서 미루어보아, 작가 본인이 늘상 받는 찬양에 가까운 대접에 대한 다소 낯간지러운 은유일 것이다(“미야자키씨, 도대체 어떻게?”). 키키의 여정 역시 찬찬히 뜯어보면 한 명의 예술가가 성장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개 예술가가 가지는 첫 번째 흥미는 메시지 전달의 효용이다. 나의 뜻을 누군가가 알아주는데서 오는 소통의 희열은 한 사람을 예술의 길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일이다. 빵집 아주머니와 손님 사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을 기점으로 키키는 배달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막상 일이 시작되고, 마감 기한이 다가오자 전달에 급급해진 메시지는 서서히 생명력을 잃기 시작한다. 새장 안의 인형으로 박제되어 버린 지지가 바로 그 꼴이다. 이후 창작자의 의도가 대상에게 아예 도달하지 못하는 사례- 할머니의 청어호박파이 사건을 겪고 나서는 배달의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다. 예술가는 슬럼프에 빠진 것이다.
인형을 배달하는 과정에서 만난 숲 속의 화가 우르술라가 상심에 빠진 키키를 만나러 온다. 키키를 데리고 오두막으로 돌아간 우르술라는 키키의 사연을 듣고 자신도 역시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가 있다며, 결국 방법은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는 것’에 있다고 대답한다. 그래도 그려지지 않는다면 낮잠을 자거나, 산책을 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그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페가수스가 그려진 환상적인 추상화다. 그 뒤에 그려진, 키키를 본떠 그렸다는 여인의 옆얼굴이 돋보인다. 도시에서 떨어져 숲 속에 은거하는 그녀의 라이프스타일만큼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그림이다. 그녀의 그림은 아름답지만, 외롭다.
짧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예의 할머니 집에 들른 키키는 그곳에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케이크를 선물 받는다. “이걸 받게 되는 그 아이에게 생일을 좀 물어봐주지 않으련?”, “그 아이도 분명 할머니의 생일이 알고 싶을 거예요!” 기묘한 소통 방식이다. 옆에 놓인 TV에서 비행선의 등장으로 들뜬 군중의 환호성이 새어 나오고 있다. 경탄과 경이 속에서 유유히 부유하던 찰나, 바다에서 불어온 돌풍에 비행선은 돌연 물구나무를 서버리고, 군중은 경악에 빠진다. 그 아래 밧줄 하나로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건, 다름 아닌 키키를 동경하던 비행광 소년 톰보. 키키는 톰보를 구출하기 위해 황급히 집 밖으로 나선다.
능력이 회복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새조차 없이 청소부 아저씨의 대걸레를 빌려 올라탄 키키는, 온 정신을 집중해 다시 날아오르는 데 성공한다. 야생마처럼 날뛰는 대걸레를 어르고, 달래고, 위협하면서 날아간 끝에 키키는 간신히 톰보의 손을 잡고 그를 구출해 내는 데 성공한다. 감동의 도가니에 물든 행인들은 모자를 흔들고 군인들은 깃발을 펄럭인다. 구름처럼 몰려든 기자들이 그녀를 향해 마이크를 들이밀고, 키키는 일약 영웅이 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마녀배달부 키키>의 플롯은 시골 소녀 키키가 도시 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비행 밖에 할 줄 모르던 마녀가 바로 그 비행 능력으로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이미 감동적이지만,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키키가 그 과정에서 얻는 것 못지않게 잃어버리는 것도 중요하다.
키키는 비행 능력을 잃어버리면서 동시에 지지의 말을 알아듣는 능력 역시 잃어버린다. 말이 통하게 되지 않는 시점이 자못 의미심장한데, 얼핏 보면 키키가 슬럼프에 빠진 탓처럼 보이지만, 또한 지지가 옆집에 사는 아리따운 도시 고양이와 짝을 이루기 시작하는 즈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먼저 도시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지지는 키키의 선배 격이 되는 셈이다. 미루어보건대 불가해성은 아무래도 이곳의 규칙인 듯하다. 최후의 순간 극적으로 회복되는 비행과 달리 이 소통 능력은 끝내 회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메시지가 통하지 않는 도시에서의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예의 비행선 소동에 주요한 단서가 있다. 키키가 톰보를 구출하는 과정은 단순한 구명 행위나 서사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다. 그것은 작품 내에서도 모든 이의 주목이 집중되는 브라운관 속 하나의 사건, 즉 영화다. 작품 속 카메라가 전달하는 것은 키키 내면의 고뇌도 아니고, 감자나 인형 같은 배달물도 아니다. 어린 마녀가 무명의 소년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옮기는, 즉 배달이라는 행위 그 자체다. 하늘에 경도된 소년을 다시 땅에 발붙이게 만든다는 그토록 감동적인 은유도 알 리 없는 군중이 눈물을 훔치고 팡파르를 터뜨리는 까닭은, 비록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언정 이 단편의 스펙터클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작가의 원숙함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이 장면을 아이러니로 그리길 거부했다는 점에 있다. 키키가 톰보를 구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찌 된 일인지 관객석에 앉아있는 우리도 작품 속 소방수나 기자들처럼 마음이 동하는 것을 느낀다. 필연 우리도 어쩔 수 없는 도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빵집 아주머니의 남편도, 부잣집의 노견도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도시인이지만, 손짓 발짓 눈짓으로 가장 강하게 정감을 뿌리는 것 역시 이들이 아니던가. 사거리에도 구원은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