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면 죽고 흩어져도 죽는다
<군체>, 2026
비록 그 끔찍한 생물학적 외피가 먼저 거부반응을 일으키긴 하지만, 좀비란 본래 개별성의 붕괴에 대한 공포다. 침을 질질 흘리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다리를 끌고 다니는 이름 없는 존재가 되는 것.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지만 그 역사의 길이만큼 대접받진 못하는, 마치 분식과 같은 장르로서 좀비는 지금까지 살아남았고(아니면 죽어남았고?), 무수한 선례 중 몇몇만이 이 ‘살아있는 동시에 죽은 존재’에 진지한 예술적 관심을 가지고 메스를 들이밀었다. <군체>는 ‘균’과 ‘집단지성’이라는 첨가물을 통해 이 해묵은 장르를 다시 짚어봐야 할 이유를 설득하며, 그런 면에서는 <부산행>보다도 진일보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군체>가 핵심 주제로 표방하는 ‘타자의 문제’나 ‘완전한 소통’은, 이러한 시도를 하는데 비교적 용이한 서브컬처에서 여러 번 되풀이된 바 있다. 20세기의 <에반게리온>부터 2년 전의 <아케인>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는 정말로 완전한가’라는 질문이 유독 판타지에서 물성을 갖기 쉬운 까닭이다. 작가의 필모그래피를 보고 예상할 수 있듯 <군체>도 사회적 알레고리의 성격이 강한 작품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것의 가장 사적인 면면이다.
‘군체’ 사건의 주동자인 서영철부터. 그는 자신을 내친 회사의 대표에게 복수하고, 아버지를 자살로 몰아넣은 소통의 부조리로부터 해방되고자 생물학적 테러를 일으킨 인물이다. 영화의 후반부, 자살의 원인이 된 아버지의 제자 권세정과의 대면에서 서영철은 말한다. ‘너에게 복수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그 비극의 원인을 제거하려는 것뿐이다’. 모든 감염자가 즉각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다음 단계로 진화한다는 점에서 효율적이고, 타인과의 불화를 일으킬 여지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정서적인 이 ‘신인류’는 얼핏 듣기에 완벽한 인류 보완 계획이다. 그러나 한 가지 모순이 있으니, 이 감염자들 사이에 엄밀히 위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모든 감염자는 서영철의 명령을 받고 그에게 복종한다. 모든 정보가 공유되지만 판단하는 것은 서영철뿐이다. 그 스스로는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는 신세계’라는 만인을 위한 인지적 유토피아를 주장하지만, 그 실상은 VIP룸 거울 사이에서 무한히 반사되며 복제되던 그의 모습처럼, 나를 복사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모두가 나를 이해하는 세계’라는 유아적 망상의 발현에 다름 아니다.
여러 장면과 필요 이상으로 설명적인 대사들을 통해 인간 역시 감염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군집을 이루고 유사한 방식의 체계를 통해 소통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 스마트폰을 통한 전파나, 장관의 말에 일사불란하는 대응팀의 움직임 따위가 그렇다. 테러 자체는 집단의 명령을 거스르는 두 개인, 권세정과 공설희의 노력을 통해 해결됨으로써 개별성에 대한 다소 평이한 긍정으로 마무리된다. 아웃사이더의 분투로 사회적 문제가 해결된다는 오래된 낭만적 이미지가 주는 쾌감이 없진 않지만, 진정 흥미로운 부분은 개별성이 형성되는 또 다른 형식, 바로 관계다.
모든 이가 동등한 감염자로만 인식되는 균사체들과, 생존욕구로만 작동하는 생존자 무리 사이에서 행동대장 경비 최현석은 하반신 마비 장애인인 누나에 대한 각별한 사랑으로 ‘내 누나’, ‘내 동생’이라는 개별성을 확보한다. 누나가 생존자 무리에게 토사구팽 당한 이후 현석은 집단에 대한 혐오와 파괴 욕구라는 극단적 형태의 개별성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한 때 누나였던 감염체, 즉 개인의 이미지를 훔쳐 쓴 집단에게 기만당해 파멸한다. 정작 최현석 본인이 피와 점액을 뒤집어쓴 살인귀가 된 후에는 균사체들과 구분되지 않는 역설적인 상태에 놓이는데, 이는 그가 균사체가 된 누나를 끝내 누나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는데 실패하는 결말과도 조응한다. 현석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감염되지 않으니, 치졸한 배타성의 전시라고 할 것이다. (권세정은 정반대로 좀비의 외투를 훔쳐 입음으로써 집단을 기만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결국 <군체>는 개인 간의 사회적 연결을 전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완전히 집단에 흡수되어도 죽고, 철저히 고립된 개인으로 남아도 죽는다. 작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하는 관계는 권세정과 공설희 사이의 가장 느슨한 연결이다. 죽은 전남편의 후처라는 중간자가 증발해 버린 기묘한 관계에서, 오히려 두 사람은 ‘이제는 없는 따뜻한 가장’이라는, 거의 인류애에 가까운 추상적 이미지를 중심점 삼아 모두를 위한 위업을 해낸다. 그러나 이조차도 완전하지 않으니, 사건이 종결된 후 권세정의 ‘이제부터 할 일이 많겠다’라는 사회 복귀 선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금 좀비가 거동을 시작하는 탓이다. 모든 개인은 집단이라는 질병의 보균자이며, 발병은 시간문제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