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음악의 힘
<Das Leben der Anderen>, 2007
예술이 인간을 고양시킨다는 믿음보다 더 독일적인 것이 있을까. 만약 독일을 대표하는 장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빌둥스로만(Bildungsroman)’, 즉 교양소설일 것이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가 각본 및 연출을 맡은 영화 <타인의 삶>은 냉전기 동독의 방첩기관 슈타지의 베테랑 요원 게르트 비즐러가 한 편의 예술과 타인의 삶을 통과하며 인간성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지독히 감정적인 사회주의
주인공 게르트 비즐러는 동독의 심문관이자 감청관으로, 자신이 행하는 비인도적 수단의 문제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체제에 혹독하게 길들여진 인물이다. 그의 상관 안톤 그루비츠나 권력의 정점에 있는 헴프 장관이 출세욕과 음욕에 눈이 멀어 있는 것과 달리, 비즐러는 출세에 관심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체제를 향한 공명심과 신념으로 움직이는 가장 순수한 인물인 셈이다. 영화 속 동독의 체제는 얼핏 거대하고 정교한 관료제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그 실상은 지독하게 사적이고 감정적이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당의 구호가 몇 번씩 언급되지만 이는 유명무실한 것이다. 극 중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압박하는 ‘라즐로 작전’ 역시 국가 안보가 아닌, 여배우 크리스타를 차지하려는 헴프 장관의 성욕에서 비롯된다.
타인과 나
비즐러가 감시하는 대상인 드라이만과 비즐러의 대조는 공간을 통해 시각적으로 극대화된다. 드라이만의 집은 늘 온화한 톤의 필터와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레벨 숏으로 생동감과 인간미가 넘치는 반면, 비즐러의 집은 퇴근길부터 어두운 밤 고정된 부감 숏으로 연출되어, 그가 거대한 체제 속의 부품임을 보여준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텅 비고 건조한 비즐러의 집은 그의 황량한 내면 그 자체다. 이들의 대조는 이웃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아이가 공을 가져왔을 때 드라이만은 기꺼이 같이 축구를 차며 어울리지만, 비즐러는 버릇처럼 공을 고발하겠다는 비밀경찰스러운 농담을 던진다.
예술의 관능
비즐러가 두 연인의 아름다운 삶에 감화되는 과정은 관음觀淫이 아닌, 청각적 동화와 모방을 통해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로 그는 감상한다. 비즐러는 차가운 헤드셋을 통해 드라이만의 피아노 소리, 두 연인이 나누는 정욕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메말랐던 감각을 자극받는다.
두 번째로 모방한다. 두 연인이 밤을 보낸 후, 비즐러 역시 창녀를 고용해 관계를 맺는다. “30분만 더 있어달라”며 그녀를 붙잡는 비즐러의 대사를 통해 그가 갈구한 것이 단순한 성욕 해소가 아닌 ‘인간적인 온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아예 드라이만의 집에서 브레히트의 시집을 통째로 훔쳐 와 읽기도 한다.
세 번째로 개입한다. 자신의 취조와 감시망으로는 더 이상 드라이만을 감싸줄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오자, 그는 직접 드라이만의 집으로 뛰어들어 결정적 증거물인 타자기를 없애버린다. 신념의 대상이 ‘체제’에서 ‘인간’으로 옮겨간 순간이다.
“베토벤의 소나타를 더 듣다가는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겠다”는 레닌의 말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비즐러를 녹이는 것은 음악의 관능이다. 피아노 선율도, 연인의 속삭임도 모두 헤드셋을 통해 청각으로만 전달되며, 나중에는 교대 근무자가 쓴 감청 보고서를 마치 음악의 악보처럼 읽는 지경에 이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 속보 역시 라디오 이어폰을 통해 청각으로 전해진다.
반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루비츠가 듣는 것은 오직 전화선 너머로 들려오는 상관의 닦달과 압박뿐이다. 취조실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루비츠는 예술이나 인간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기에 끝내 체제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타협의 비극
드라이만을 향한 사랑과 배우로서의 출세욕 사이에서 고심하던 크리스타는 ‘스폰서 없이는 무대에 오를 수 없다’는 비정한 현실관과 타협해 타자기의 위치를 고발한다. 막상 집에 요원들이 닥치고 자신의 배신이 탄로 날 위기에 처하자, 드라이만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던 크리스타는 집 밖으로 도망쳐나가고 옆에서 달려든 자동차에 치어 목숨을 잃게 된다. 비즐러라는 관객을 두고 드라이만과 ‘삶’이라는 아름다운 연극을 연기하고 있었음에도 정작 본인은 이를 보지 못한 탓이다.
타자기가 숨겨져 있던 장소가 드라이만의 집과 바깥을 나누는 문지방이라는 점은 자못 의미심장한데,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사랑은 집이라는 공간을 넘어설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동독이라는 사회적 공기와 두 사람의 사랑을 구분 짓는 경계로서 문턱은 작용하고 있고, 크리스타는 집을 빠져나와 바깥으로 나가려는, 즉 그녀의 출세와 정확히 같은 경로를 밟아 자신의 최후에 도달한다. 또 일찍이 보여졌듯 자동차는 헴프 장관이 크리스타에게 음욕을 드러냈던 공간이기도 하다.
<타인의 삶>
억압과 저항에 미적지근한 태도로 살아남았던 드라이만은 친구 예르스카의 죽음을 계기로 반체제 에세이를 서독에 기고했다. 통일 이후 그는 한동안 절필하는데, 헴프 장관의 조소 어린 말처럼 어느 정도는 더 이상 저항할 억압이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이만은 이후 슈타지의 문서 보관소에서 자신의 감청 기록을 읽고 모든 내막을 알게 된다. 자신이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HGW XX/7’이라는 암호명의 요원, 즉 비즐러의 묵묵한 그러나 열성적인 은폐 덕분이었음을 알게 된 드라이만은 드디어 쓸거리를 찾았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반항적 에세이도 희곡도 아닌 그의 스승이 다시 태어나면 쓰고 싶다던 소설로, 자신을 지켜준 수호천사에 대한 이야기다.
통일 후 우편배달부가 된 비즐러는 서점 쇼윈도에 걸린 드라이만의 신작 소설 <좋은 사람을 위한 소나타>를 발견한다. 책을 구매하며 “선물 포장할 건가요?”라고 묻는 점원의 질문에 비즐러는 덤덤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답한다. “아닙니다. 이 책은 저를 위한 겁니다.”
마지막 대사를 통해 드라이만은 다시금 예술가로 부활하고, 비즐러의 삶 역시 타인의 삶을 훔쳐보던 모방자에서 벗어나 온전히 다루어질 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된다. 피사체와 작가의 경계를 허물고 쌍방으로 영향을 미치는 아름다움, 예술이 가진 구원의 힘을 <타인의 삶>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