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이준익
<왕의 남자>, 2005
2000년대, 동성애, 사극이라는 도전적 과제들을 한 데 묶어놓고도 전위에 심취하는 일 없이 로맨스 서사에 집중했다는 사실이 가상하다.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를 소년에게 투영하는 왕ㅡ 정신분석학 지지자는 어머니의 권위를 가진 남자를 압박하는 것에서 전복의 의지를 볼 것이고, 보통 관객은 압제자의 일탈적 남색과 대비되는, 가나다 콤플렉스 없이 상호존중으로 지탱되는 이반의 일반성(건강한 성애는 모두 같다)을 볼 것이다.
주제 운용 형식으로는 두 사람의 오랜 직업- 광대, 특히 줄타기와 가면극이 이용되는데, 그것은 두 사람이 지상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동성애를 일시적으로 실현시키는 장이며, 고도가 불분명한 언덕 위에서의 맹인 행세(너 여기 있고, 나 여기 있음에도 서로 마주할 수 없는 형국)와 서슬 퍼런 천장의 모습으로 등장한 한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쪽이 완전히 실명하고서야 클로젯을 벗어난 두 남자의 허공답보를, 그 아래서 벌어지는 역모와 엮어 일종의 성性 혁명으로 보는 것은 너무 고리타분한 해석일까.
<결혼 소동>, 조안 미클린 실버
<Crossing Delancy>, 1988
신도시 블루스타킹의 신랑감 찾기. 문인들과 지적 교류를 누리는 화이트칼라 여성에게 중매결혼은 구시대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낯설고 새로운 것이기도 하다. 사랑은 ‘돌풍에 모자를 잃어버리듯’ 우연히 찾아오기도 하지만 또 ‘원숭이를 잡으려면 나무를 올라야 하듯’ 품을 들여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집안의 가구처럼 굳세게 버티는’ 비결도 알아야 한다. 그 말에 맞게 집안에 가구가 하나도 없는 안톤과 그의 이기적 행동거지들, 이지를 수단으로 끌어내리는 그의 소설과 오로지 대상으로만 대하는 샘의 노트(“이사벨과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 등등, 영화는 할머니의 조언처럼 넉넉하고 인심 좋은 말씨로 사랑의 조건을 설명한다. 사실 피클과 문학의 극적인 대립보다도 여인의 선택에 방점이 놓여있지 않은가 싶은데, 그런 의미에서 안톤의 마지막 대사(“여기서 속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요!”)는 분명 버려진 남자의 발악 이상의 울림이 있다. 영화의 악당은 남자들도, 이지도 아니고 그녀의 우유부단이다. 중매와 자유연애의 혼란 속에서 진정한 결실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사랑하는 손녀를 시집보내기 위해 치매 연기까지 하는 할머니’의 결단력에 있다고 <결혼 소동>은 결론짓는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티븐 달드리
<The Reader>, 2008
아이에게 있어 어른은 스승인 동시에 적폐다. 멋모르던 열다섯 살 소년 마이클에게 있어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것도, 더러울 때 씻겨준 것도 한나지만 정작 그녀가 문맹이라는 치명적인 결점은 간파하지 못했다. 한 편으론 무턱대고 손가락질하려 드는 젊은 세대의 무지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론 ‘그랬다면 어땠을까’ 싶은 첫사랑의 아쉬움이기도 하다. 한나를 중심으로 구성되던 악의 평범성은 지울 수 없는 첫사랑과 무심한 수용소 간수의 양가감정을 돌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어중간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시대의 피해자이면서 또한 가해자다. 감옥에 가서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 읽어나갈 줄 아는 독자로 거듭나지만, 새로운 깨달음이 그녀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뼈저린 각성뿐이다. 훗날 마이클이 전해준 그녀의 유품에서 돈이 아닌 깡통만 받겠다는 마사의 말에는, 그녀의 삶이 아닌 그녀라는 사람 자체만 남기겠다는 지나간 시대에 대한 타협적 역사관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모든 교훈은 다시금 구전이 되어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더 리더>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 특유의 흐드러진 영상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그러한 일종의 시각적 품위가 영화의 소재와는 다소 위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풋풋한 어린 시절의 로맨스는 장미꽃과 햇볕으로 장식되어 있어도 상관없지만 실제 역사의 비극을 다룰 때는 다른 문제다. 요컨대 아름다운 시절은 충분히 아름답지만, 추한 시절은 충분히 추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폭포 위의 무지개가 아니라 밑바닥에 고인 진창을 비추어야 할 때도 영화는 고개를 내려다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교회에서 수용자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한나의 무심한 눈빛을 단 한 번만이라도 인서트로 비추어 주었더라면 그 간극이 메워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