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

미국천장

<Brutalist>, 2024

자못 장엄하고 웅장한 오프닝ㅡ 카메라는 좁고 기다란 복도를 통과해 드리운 창공, 그리고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을 비춘다. 물구나무선 미국의 초상은 분명 아메리칸드림의 민낯을 비추겠다는 영화의 출사표다.

부다페스트의 저명한 건축가 라즐로 토트는 나치 정권의 마수로부터 도망쳐 미국으로 건너왔다. 말도 통하지 않는 외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막노동을 전전하던 그는 가까스로 어느 사업가의 개인 서재를 작업할 기회를 얻게 되나 자리를 비운 사이 변해버린 서재의 모습에 화난 집주인의 불같은 호통에 착수금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다. 이내 호사가들에 의해 그 진가가 밝혀지고, 주인 밴 뷰런은 머쓱한 사과와 함께 다시금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이것은 천재의 이력에서 으레 보이는 낭중지추일까, 아니면 그저 심심한 대부호의 변덕일까? <브루탈리스트>가 라즐로가 발붙인 새로운 땅에 대한 이야기인 이상, 후원자에 대한 이해가 선행하지 않고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듯하다.

해리슨 리 밴 뷰런,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백인 사업가인 그는 그 모든 단어 하나하나에서 미국 그 자체다. 라즐로와의 첫 대담에서 밴 뷰런은 대뜸 자신의 어머니와 조부모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털어놓는다. 한 때 사생아였던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보던 작자들이, 그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제야 손자로 인정하고는 뻔뻔하게 금전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다. 그는 보란 듯이 수치심만 안기고 돌아섰다며 자랑스레 말한다. 판에 박힌 듯한 이 성공신화는 그의 냉철한 자본가적 면모와 뿌리와의 절연을 동시에 강조한다. 줄곧 강조되는 라즐로의 민족성에 비추어보아 방점은 후자에 찍혀야 마땅할 것이다. 당장 어머니조차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지 않고, 오히려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과 결부되는 판이니 말이다.

영화가 2부에 접어들면 그동안 편지로만 언급되던 라즐로의 아내 예리제벳이 등장한다. 뜬금없이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그녀는 영양실조를 호소하지만 이는 어느 모로 보나 실향의 충격이다. 조피아의 꾹 다문 입술ㅡ목소리를 잃은 민족!ㅡ도 역시 같은 맥락인데, 그녀의 침묵과 라즐로의 구두장이 같은 억양, 그리고 예리제벳의 유창함은 같은 스펙트럼 위에서 일종의 점강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뒤이을 강간 사건을 빌미로 드디어 유대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예리제벳이 후들거리나마 두 다리로 서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 2부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장면일 밴 뷰런의 강간은 이탈리아 벽지의 어느 대리석 광산에서 벌어진다. 라즐로는 약에 취해 모르는 여자와 춤을 추고 애무하며, 밴 뷰런은 그런 그를 위에서 내려다본다. 라즐로의 약점인 무분별한 성욕의 발산은 그조차도 어쩔 수 없는 예술가적 기행이고 또한 억압의 분출일 것이다. 그러나 밴 뷰런의 눈에는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확인시켜 줄 말썽으로 보일 뿐이다. 광산의 좁고 기다란, 그리고 어두운 복도는 영화의 첫 장면이었던 캄캄한 선상을, 그리고 라즐로가 오래전에 탈출했다는 수용소를 연결 짓는다. 밴 뷰런의 성폭행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오버랩시키며 라즐로가 여전히 ‘자유인이라고 착각하는 가장 절망적인 노예 상태’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에필로그는 베니스 곤돌라 위 시점 쇼트로 시작하여 관광객, 즉 본격적인 외부인의 관점으로 돌입한다. 미술전 물건들을 호기심 찬 눈빛으로 살피는 남자의 다큐멘터리적 인서트 역시 같은 해석에 일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똑같이 외부인인) 조피아의 수미상관으로 감싸지는 내러티브, 역사가 예술을 소화하는 방식을 목격한다. 눈썹이 희끗해진 라즐로가 조카의 ‘인스티튜트’를 향한 시오니즘적 해석에 어디까지 동의했을지는 알 수 없으나(‘정육면체론’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전형적인 예술지상주의자다) 그중 한 가지ㅡ’현실의 끊임없는 압박 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게끔 만드는 구조’에는 영화 전체와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백색의 십자가 밑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 밴 뷰런, 새 양식과 공존할 수 없는 헌 채광창과, 그리고 또다시, 칠흑의 복도를 통과해 마주한 하늘과 자유의 여신상을 말미암아 그것이 스스로 상징하는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음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그 지엄한 눈빛 아래에는 뿌리를 잘라낸 채 성공하거나, 압박과 겁탈에 무너지거나의 이분법적 미국이 있을 따름이다.

※ 본 글은 과거 모 커뮤니티에 직접 게시했던 비평을 바탕으로 수정하여 재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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